청교도들의 신앙생활

박영호 대표회장님의 복음신문 기고문과 칼럼 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 140년이 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을 위해 희생했으며,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한기보)는 1980년 창립 이후 보수신학을 지켜왔다. 보수신학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하며, 청교도의 경건한 삶을 강조한다. 한기보는 전통적 신학을 바탕으로 세속주의에 맞서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
대표회장 박영호

마틴 로이드 존슨

작성자
golee1029@naver.com
작성일
2025-03-30 14:53
조회
76
  1. 로이드 존스의 생애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1899-1981)는 1899년 12월 20일 남웨일즈 카디프(Cardiff)에서 헨리 로이드 존스와 막달렌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의 성격은 낙천적이고 도덕적이며 강직했고, 모친은 지성적이고 활동적이었다. 로이드 존스가 11세가 되었을 때 집 화재로 인해 존 웨슬리처럼 극적으로 구출되었으며, 란제이오에 있는 트레거튼 문법학교에서 공부했다. 그 후 16세 때에 성 바톨로뮤 병원의 부속 의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며, 나중에는 탁월한 성적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게 되었다.

또한, 그는 왕실 주치의였던 토머스 호더 경을 보좌하는 수석 진료소장으로 일하면서 병원 의료학교에서 강의와 연구에 전념했다. 어린 시절부터 20대 이전까지 복음을 듣지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도 않았던 젊은 로이드 존스는 지성적이고 교양 있는 명의로서 이름을 날리는 길에 막 들어섰다. 20대 중반에 거듭나게 된 로이드 존스는 인생에서 몇 가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먼저 탁월한 의사 로이드 존스는 내과 진료를 통해 가난한 자들이나 귀족들 가운데 상당수가 술과 성생활의 방종으로 망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인간의 문제는 신체나 지식에 있지 않고 영적인 데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죄인 됨의 의식과 영적 빈곤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슬픈 죽음과 그의 형 해럴드의 비극적인 요절, 친구 애인의 죽음은 그에게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었다.

로이드 존스는 1927년 1월 채링 크로스교회에서 베단 필립스(Bethan Phillips)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생활을 54년 동안이나 지속하였으며 금실이 좋았고 행복했다. 로이드 존스는 놀랍게도 자신이 웨일즈에서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받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곧 그는 복음 설교자가 되기 위하여 의사직과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는 애버라번 샌드필즈에 있는 베들레헴교회의 목사로 초빙을 받게 되었고, 1927년 10월 26일 칼빈주의 감리교(Calvinistic Methodist)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영국 복음주의뿐만 아니라 전 세계 교회에 폭넓은 영적 감화와 영향력 그리고 많은 유익을 끼쳤다.

로이드 존스는 1968년에 암으로 진단받았고, 1979년에 들어서는 병이 위중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약속을 취소해야만 했다. 하지만, 1980년 후반에는 다시 설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6월이 되자 그는 병으로 더 이상 설교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회고록을 집필하라는 주위의 권고를 거절했다. 1981년 2월, 로이드 존스는 그의 가족에게 자신이 이 지상에서 해야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가족에게 “병 고침을 위해 기도하지 마시오. 영광으로 입성하는 나를 방해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1981년 3월 1일 잠자던 중에 고요히 숨을 거두면서 82세의 일기로 영원한 본향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그가 사랑했던 웨일즈의 뉴캐슬 에믈린에 있는 필립스 가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비석에 새겨진 비문은 바로 그의 가슴에 자리 잡고 견지했으며 그렇게 기억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다음은 그의 삶의 여정을 이끌어 온 동기가 되었던 말씀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1. 로이드 존스와 목회 사역
1927년 11월 28일 로이드 존스의 첫 목회 지역은 애버라번 샌드필즈(Sandfields, Aberavon)에 있는 베들레헴교회였다. 그는 70여 명의 성도에게 첫 설교를 했다, 베들레헴교회는 웨일즈 칼빈주의 감리교회인 회중교회였다. 그의 첫 설교의 본문은 고린도전서 2:2로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해 말씀을 선포했다. 이러한 그의 복음 선포에 성령의 능력이 크게 역사했다. 인류의 구원을 향한 그의 열정은 그의 회중에게 불을 붙였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를 들었던 술주정뱅이들과 불같은 성질을 가진 자들, 항만 노동자들, 철강회사 직원들, 무당들, 광부들이 회심했다. 이처럼 로이드 존스가 설교할 때마다 수많은 회심자가 나왔다. 그 지역은 철강 산업과 광산 지역의 중심지로서 노동자 계층과 극도로 가난한 주민이 많았고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뮤지컬과 연극회나 스포츠 클럽 등의 활동을 없애고 대신 월요 저녁 기도회를 활성화했다.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철저하게 복음 전도적이었으며 성경 연구와 복음 설교에 전념했다. 기도회는 매주 2-3백 명이 참석했으며, 토요일 남전도회 모임이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토의하는 모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베단(Bethan) 로이드 존스의 여성 성경공부반이 처음에는 집에서 모였으나 점점 그 수가 늘어나자 교회로 옮겨 진행했다. 이처럼 비상한 기름 부음이 로이드 존스의 사역 위에 임하였고, 그의 사역은 초창기부터 이미 큰 능력이 나타나 1929-1931년 사이에 그가 그렇게도 갈망하던 부흥이 남웨일즈 목회에서 흘러넘쳤다. 마침내 11년 동안 그의 사역에서 93명의 세례교인이 530명으로 늘어났다. 교회 단체 생활은 변했고, 지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산업 지역에서 기독교를 살아 있는 종교로 만들었다. 거친 샌드필즈에 놀라운 영적 부흥이 일어났다.

웨스트민스터교회(Westminster Chapel) 담임목사인 캠벨 모건(Campbell Morgan)은 웨일즈에서 사역을 열심히 잘하고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를 청빙했다.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한 로이드 존스는 1938년부터 캠벨 모건의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모건의 은퇴로 인해 1943년부터 본격적인 담임목회 사역을 했다.

알미니안주의와 세대주의적인 색깔을 내포하고 있었던 캠벨 모건과는 달리 로이드 존스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위대한 신학과 청교도들의 신앙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칼빈주의의 주권적 은혜 교리를 주저 없이 선포했다. 그의 명성은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로이드 존스는 진정한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설교가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주일 아침에는 목회 설교를 했고, 저녁에는 전도 설교를 했다. 또한, 금요 저녁 모임에서는 로마서 강해설교를 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교리들을 실제적인 적용과 함께 가르쳤다. 개혁신학과 교리를 강조한 존스는 그의 회중이 신학적으로 문맹이 아니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항상 신학과 교리가 가득했다.

또한, 그는 기도를 통해 회중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인도했으며 설교는 항상 강해설교를 했다. 1947년 주일 오전 예배는 약 2,000명이 되었고, 저녁 예배에는 평균 2,500명 정도가 청중석과 회랑, 발코니까지 가득 들어찼다. 수많은 사람이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는 로이든 존스의 설교를 듣기 위해 웨스트민스터교회에 몰려들어 예배당은 가득 메워졌다. 1968년까지 30년, 그의 놀라운 사역을 통하여 교회 확장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는 30년간 그 교회를 섬기며 20세기의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목회 사역 중 하나를 연출하게 되었다. 그의 영향력은 전 세계로 확산하여 나갔다.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설교 사역은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소명이며, 교회와 목회 사역의 최우선적 임무였다. 그는 설교의 우위성에 대한 높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설교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가 쇠퇴기에 빠진 시대는 언제나 말씀 전하는 것이 감퇴하여 있었고, 개혁과 부흥이 있을 때는 위대한 말씀 전파의 시대였다고 주장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 핵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죄, 회심, 살아 있는 교회, 확신, 중생, 거룩, 교회 연합, 교리, 하나님의 주권, 영광, 진노, 심판, 마귀 등으로 설교했다. 또한, 그는 오직 복음적인 설교만이 사람들을 교회로 모을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강단에서는 일절 농담이나 일화,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또한, 절대로 강단 앞으로 나오라는 초청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만약 말씀이 신실하게 선포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설교의 사활을 좌우하는 특징은 성령의 능력 충만이었다. 그 능력 충만은 곧 성령의 기름 부음이었다.

로이드 존스에게 설교와 영성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 설교자에게 기도의 영역과 성경 연구의 영역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로이드 존스는 하나님과의 생명력 있는 교제를 삶의 첫 번째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래서 그가 기도에 우선권을 두고 평생을 살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특히 그가 기도할 때에 얼굴에서 가끔 빛이 났다고 한다. 그의 힘은 무엇보다도 개인 기도에 있었다. 기도가 희미하다면 강단에서 능력 있게 설교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로이드 존스가 회중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설교에 못지않은 은혜의 수단이 되었다.

로이드 존스의 영성은 성경으로부터 시작한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성경은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그의 영혼의 만나요, 그의 삶을 이끌고 가는 힘이었다. 그는 아마도 20대 중반부터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 〈성경 읽기 표〉에 따라 읽었으며, 평생 구약은 55번 이상을, 신약은 110번 이상을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경무오설을 고집한 로이드 존스의 유일한 권위는 성경책이었다. 그가 성경 강해 도중 그 성경책의 페이지를 넘기면 성도들도 따라서 성경을 넘겼다. 그는 오직 성경에만 호소했다. 그는 성경에 완전히 정통했다. 그는 성경에 젖어 있었다. 그의 메시지 힘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전적으로 받아들였고, 완전 영감(plenary inspiration)을 굳게 믿고 있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여러 모임에서 〈현대교육〉, 〈시대의 표징〉, 〈현대 웨일즈의 비극〉, 〈위대한 영적 각성〉이라는 주제로 설교했다.

성령세례와 부흥: 로이드 존스에게 있어서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믿는 자 안에는 성령이 거하시지만, 성령세례를 받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람은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도 거듭난 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거듭남(중생)은 성령의 기본 세례의 사역이고 성도가 성령 충만의 생활이 이루어지면 성령의 능력 세례와 능력 충만이 부어진다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을 강하고 충만하게 부어주는 능력 세례와 능력 충만을 주장했다. 이렇듯 성령의 세례는 한 사람의 영혼에 새롭고 신선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드러내 준다고 말했다.

성령의 능력 세례가 개인적으로 한 성도가 경험하는 일이라면 부흥은 성령의 충만함이 여러 성도에게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그는 한 번에 많은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는 현상을 부흥으로 간주했다. 이처럼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능력 세례와 능력 충만을 부흥 운동과 연결했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능력 세례임을 믿었다. 기독교의 모든 부흥은 오순절의 반복이며, 오늘날에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40년 동안 노력해서 얻은 것보다도 많은 것을 5분 동안의 부흥에서 이룰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교회를 부흥으로 이끌었던 성령의 부어주심을 목도하기를 원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로이드 존스의 가장 큰 욕구는 하늘로부터 임하는 부흥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서 1859년의 부흥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런던 웨스트민스터교회에서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한 시리즈 설교 24편을 했다. 평생 교회 부흥을 갈망한 로이드 존스가 부흥 설교를 할 때 본문은 대부분 구약(창 26장; 수 4장; 출 33장; 사 62-64장)이었고, 신약(막 9:28-29; 행 2:12-13)에 대한 것은 일부분이었다.

그는 그의 책 『부흥』에서 왜 부흥이 필요한지, 부흥의 긴박성, 부흥의 성격과 목적, 부흥의 내용과 결과, 부흥을 위한 기도와 열정 등을 설명했다. 그는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믿으면서도 인간의 책임인 회개와 근면한 성경 연구, 끊임없는 기도 생활, 거룩하고 경건한 삶, 예수 그리스도, 교리, 성령 사모함, 십자가 자랑과 보혈의 찬송과 하나님에 대한 갈증 등을 강조했다. 반면에 오늘날 교회가 쇠퇴한 원인은 “성경의 권위 무너짐, 이성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 신학, 성령 소멸” 등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1959년 청교도연구회(Puritan Conference)에서 〈부흥-그 역사적 및 신학적 연구〉에 대한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임을 부흥처럼 잘 입증하는 것이 없으므로 이 순간에 교회는 성령의 부어주심을 위해서 기도하고, 부흥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 쇠퇴, 즉 교회가 능력을 상실해 버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철학적이고 논쟁적인 변증학이나 전도 계획 설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새로운 부어지심의 역사 외에는 회복될 길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가 말한 부흥은 성령이 찾아오시는 사건으로서 복음 전도 캠페인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사람들에 의해 조직된 전도 집회에서 결신을 촉구하여 회심자를 증가시킨다든지 교회에 행복과 재정이 차고 넘치는 그런 부흥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그가 추구한 부흥은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이요, 성령의 부어주심이요, 소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해 영적 생활의 새로운 변화이다. 그의 부흥 설교 속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부흥의 목마름이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는가를 알 수 있다.

 
  1. 로이드 존스와 강해설교
로이드 존스는 그의 명저인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내용(sermon)과 설교행위(preaching)의 원리를 제시하며 성경적 설교로 초대한다. 설교내용은 신학과의 관계성을, 설교행위는 성령의 능력과의 관계성을 설명한다. 그의 설교학 강의는 청교도 설교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윌리암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를 이해하는 데에 신학적 접근과 인식에 대한 고려와 이해가 중심적 역할임을 강조한다. 그는 신학을 본질상 실천을 위한 분야로 보았다. 그의 설교와 신학의 관계성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이 근래의 복음주의 전통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전형적이지 않다. 하지만, 설교에 관한 신학의 두드러진 역할을 중요시하는 그의 관점 때문에 신학적 설교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강해설교의 전제 조건 중 하나다. 그는 교회의 생명을 위해서 신학의 문제가 설교의 문제보다 선행한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 신학적 전제 조건을 전반적인 설교내용, 더 구체적으로는 무엇이 설교내용을 결정하는가에 대한 이유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설교자의 신학적 이해가 그 설교의 내용을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즉, 성경의 전반적 지식, 성경을 꿰뚫고 흐르는 것에 대한 지식, 이러한 성경적 메시지의 부재로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고 쇠퇴하고 있으며 사회가 병들어 가고 있음을 지적한다.

로이드 존스는 오직 신학적 개념의 강해설교가 영혼을 위한 양식임을 제시하며, 설교자들이 교리 설교와 관련된 문제의 본질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진리를 선포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설교임을 주장한다. 이 글은 로이드 존스의 이러한 강해설교와 신학의 관계성을 그의 저서 『목사와 설교』를 중심으로 고찰한다.

강해설교의 전제 조건: 설교자는 성경과 교회,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속죄, 부활, 재림, 성령 등 성경적 내용을 올바로 숙지해야 하며, 인간의 본성과 죄 그리고 은혜에 대하여 올바른 교리적 기초가 있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를 설교하는 일은 성경에 기초한 목회 사역에서 최우선 순위를 차지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내용이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설교내용이 성경 본문을 성령 조명을 통해서 해석하고 설명해 주어야 함을 말한다. 그는 교회 역사가 밝혀 주고 예시했으며, 신약성경 자체에서의 증거가 강해설교의 최우선 순위가 신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성경의 모든 메시지가 이를 주장하고 이에 대한 궁극적 당위성으로 설교자를 인도한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에서 신학의 역할을 매우 중요시하며, 이는 설교를 준비하고 전달하는 과정과 준비 방법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큰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사람의 진정한 필요와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본질을 고려해 보는 순간, 교회와 목사의 주된 임무는 사람의 진정한 죄에 대한 회개와 그에 대한 유일한 치료법과 치료에 대해 선포하고 설교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와 신학의 관계성을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일반 명제를 제시한다.

“설교는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는 일말의 오해도 남기지 않기 위해 어떠한 설교의 유형도 신학적이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단정 지었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주장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복음주의 설교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이 점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복음주의 설교의 입장도 매우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로이드 존스는 “만약 복음주의 설교가 신학적이지 않다면 이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복음주의 설교일 수가 없다”라고 밝힌다.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모든 면에서 복음주의 설교가 오히려 더욱더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당신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하는가? 왜 복음을 믿으라고 하는가? 회개는 인간에 대한 교리, 타락에 대한 교리,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교리를 논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곁으로 인도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또한 어떠한 근거로 그들을 인도하는지 알리지 않고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가?”

로이드 존스는 강해설교를 위해서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직신학에 대한 지식은 의사에게 해부학에 대한 지식과 같다. 그는 조직신학에 비추어 볼 때 죄와 사망의 몸에 감염된 사람들의 영적 질병에 대한 진단과 처방 그리고 치료책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조직신학의 중요성에 관한 신념적 특징들을 우선 그의 부정적인 주장과 긍정적인 주장을 통해 고찰한다. 로이드 존스 설교가 신학이나 신학의 한 관점을 강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누구도 어떤 특정 구절에 자신의 의견을 꿰맞추는 것을 정당화할 수가 없다. 일부는 자신들만의 조직신학으로 그러한 과오를 범한다. 그러한 사람은 특정한 교리를 한 구절에서 추출한다. 그 교리가 진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그 교리가 그 특정한 구절에서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 문제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긍정적인 주장을 볼 수 있다. 그는 설교자가 전체적인 성경적 메시지, 즉 자신의 이해를 통해 통일을 이룬 메시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경 한 부분을 세밀하게 현미경으로 살피듯 관찰하고 분석해 가는 것을 통해 본문을 논증하고 적용하는 하나님의 전체 경륜을 전하는 강해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자가 궁극적으로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 신학에 정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조직신학을 잘 알고 그 기반 위에 잘 다져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며 조직신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조직신학이 설교자의 뒷배경이며 중심적인 영향력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각 메시지가 성경과 신학의 통일된 한 부분이어야 하며, 각 메시지는 총체적인 진실의 한 부분이나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한다. 메시지는 절대 고립된 하나의 무엇일 수 없다. 그에게 이것은 보편적으로 지지가 되는 성경과 성경의 비교를 통한 해석 원리의 효과이며 의미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관행이 설교자들이 단편적인 성경 구절을 성경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토막을 내어 설교할 때의 위험을 배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설교자가 특정 구절이나 구절들을 별도로 인용할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우리가 모순된 설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특정 구절을 설교하고, 만약 그 설교가 다른 구절들과 또는 전체적인 진리와 연결되어 있지 않을 경우, 우리가 다음의 설교를 할 동안 그전의 설교와 상반되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피하는 길은 언제나 조직신학적인 설교를 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방법과 접근론을 제시한다. 조직신학의 바람직한 사용은 우리가 특정한 교리를 특정 구절에서 발견했을 때 중요하고 필수적이며 총체적인 성경의 교리가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주장하는지를 엄밀히 따져 보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신학적 강해설교 방법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자의 소명에 대한 이행이라고 여긴다. 그는 설교자는 항상 성경 본문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들이키고 우리의 온몸이 그 진리로 가득 채워지며 우리의 삶이 말씀으로 변화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조직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다시 한번 명확하게 밝힌다.

“아마도 신약 시대와 초대 교회의 설교 방식이 지금 우리에게 친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 나의 이론을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특정한 구절들을 분석하고 설명하고 적용하는 방식을 취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는 신약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설교하였는가? 그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위대한 메시지, 이 총체적 진실, 구원에 대한 완벽한 교리를 설교했다. 나의 논지는 이것이 우리가 항상 따라야 할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특정 구절 개개의 해석으로 이루어지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신학과 설교의 전반적인 관계다.”

이제 명확히 그의 강해설교와 조직신학의 관계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조직신학적 설교는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 원칙이다.

둘째, 강해설교 원칙이 설교 준비와 내용에 대한 방침의 기조다.

셋째, 조직신학적 설교는 로이드 존스가 주창한 건전한 강해설교의 전제 조건이다.

넷째, 조직신학적 설교는 모든 설교자가 본문 설교(textual preaching), 주제 설교 (topical preaching), 극적인 설교(dramatic preaching) 등 어떤 유형의 설교를 하든 따라야 할 보편적 원칙이다.

다섯째, 이 조직신학적 설교 방법의 실행이 성경적 설교, 사도적 설교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 역사에서 저명한 설교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해 이 이론의 구체적 실례를 찾았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조화로운 설교를 말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를 경탄케 하는 이유는 그의 총체성, 즉 조화로운 설교다. 그는 위대한 신학자이자 위대한 전도자였다. 우리는 얼마나 우둔해졌는가! 그는 사도 바울과 같이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조화시켰다. 그는 우리의 심령과 문제를 다룸과 동시에 위대한 설교자였다. 에드워즈의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이라는 교리 설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설교다.

강해설교의 중요성: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조직신학의 관계성을 통해 두 가지 명백한 결론과 교훈을 도출해 낼 수 있다.

첫째, 어떠한 방법과 통찰력에 대한 열성과 애정을 가진 설교자라도 조직신학적 이 해의 기본을 단 한순간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신학적 디다케(didaka)에 대한 교리는 모든 설교자의 지표다.

둘째, 설교자는 언제나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에게 맡겨진 자신의 소명을 지켜 나가야 한다(딤후 1:9, 14; 롬 7:14).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의 기본 원칙에 대한 부동적 접근 방식은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생각이다. 그의 이러한 제의는 소명과 사역에서 설교가 차지하거나 차지해야 하는 가장 중요하거나 중심적인 것에 대한 주의점에 관한 것이다. 그의 목회 사역의 많은 부분에서 최우선적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부흥 설교’다. 설교만이 회개와 부흥을 가져온다. 그는 설교에 대해 어떠한 의심, 조건 또는 의혹의 소지도 두지 않았다.

로이드 존스는 누구에게 부여되든 설교의 역할이야말로 가장 높고 위대하며 영광스러운 소명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이러한 설교의 중요성에 대한 신념은 곧 이 시대에 너무나도 부족한 진정한 설교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한다. 로이드 존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금 시대의 기독교회에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설교임을 선언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시급한 문제이므로 그는 진정한 설교야말로 명백히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 대한 이러한 신념과 접근을 토대로 그의 확고한 설교 최우선주의에 대한 근거를 조명해야 한다. 그는 “설교는 필요한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 최우선주의 이론은 성경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인 세 가지 명령에 의해 확립됨을 보여 준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에 관한 현시점의 문제, 즉 “설교는 필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열거한다.

첫째, 오늘날에도 설교는 필요한가?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질문의 존재 자체가 이 시대의 교회 상태에 관한 극명한 반영이라는 것이다. 설교 무용론은 전 세계를 아울러 이 시대 교회의 무능력함과 위험한 빈사 상태를 반증하는 중요한 설명을 찾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빛바랜 현재 교회의 영적 상태와 설교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현재는 그리스도인들이 설교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둘째, 무엇이 이러한 현재의 설교에 대한 반응을 초래했는가? 로이드 존스는 보편적으로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보편적인 이유와 교회와 관련된 직접적인 이유를 거론한다. 우선, 그 보편적인 이유를 로이드 존스는 볼드위니즘(Baldwinism)이라고 지칭한다. 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전 영국 수상으로부터 기인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가 자신의 연설가로서나 웅변가로서 자질 부족으로 인해 훌륭한 연설가는 곧 믿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식의 발언으로 연설이나 웅변의 중요성과 가치 자체를 깎아내렸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는 결국, 웅변가나 달변가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야기시켰고 급기야 사회 전반에 이러한 불신이 만연되었으며, 교회의 설교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이 볼드위니즘이다.

셋째, 현재 교회와 관련된 설교에 대한 반응의 직접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주저 없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의 실추와 진리에 대한 믿음의 저하를 이유로 제시한다. 또 19세기 말 등장한 설교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이 현재의 상태를 반영한다고 설명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미국의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가 있다. 그는 설교꾼의 주요 특성을 완벽하게 나타내고 쇼맨적인 요소가 매우 많았다.

로이드 존스는 이런 종류의 부흥사 설교꾼을 독자적인 범주로 분류한다. 이들을 진정한 설교자이기보다는 관객을 끌어모으는 수완으로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는 직업적 설교가로 지칭한다. 로이드 존스에게 이들은 경멸의 대상이었으며, 그는 이들을 본질보다는 겉치레를 중요시하여 연설과 달변 그 자체를 중요시하여 설교를 하나의 즐길 거리로 전락시킨 주범으로 간주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지적한다. 결국, 설교 전달의 진정한 의미가 실추되었음을 지적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를 세 가지 요인으로 분석한다. 설교문의 인쇄와 출판이 나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설교문을 읽는 것으로 설교를 대치한다는 것이다. 설교는 목사와 회중 사이에 접촉점이 있을 때 번개와 뇌성이 울리고 삶의 변화가 오는 것이다. 수필가들의 영향이다. 스코티쉬 학파의 설교자들이 문학적 또는 역사적 언급이나 인용에 주안점을 두기 시작한 점이다. 그들은 설교자이기 전에 수필가였고, 그들의 수필을 설교로 출판해 대중에게 설교로서 인식되었다. 몇 가지 부수적인 사항이 진정한 설교란 무엇인지에 대해 오도되는 개념을 조장한 것이다. 그것은 설교에 필요한 것이 단순한 수다거리나 정형화된 인사 또는 조용한 이야기 정도라는 생각이 침투한 것이다. 또한, 예배 형식에 대한 것이 중요시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대중예배에서 흥미 요소의 증가를 예로 든다. 간증이 늘어나고, 개인적인 체험이나 상담이 주를 이루게 되는 것 등이다. 그는 현재의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교회 밖 또는 연장선에 있는 사회복음과 활동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진정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교회 울타리를 떠나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이러한 인간화의 단체를 구성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들의 영향이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고 본다.

사회 구원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그들과 섞이고, 같이 생활하며, 인생을 나누며, 단지 그들의 짐을 감당하며 그들과 하나 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인간화를 제안한다. 나아가 이들은 선교사들이 진리를 설교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기보다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람들과 섞이며, 특히 정치와 사회봉사 활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것이 현재의 진정한 설교에 대한 회의적 반응을 초래했다고 강조한다.
  1. 강해설교의 논제와 명령
로이드 존스의 설교와 교회 사역에서 설교의 위치에 관한 논제에 대해 그리고 그가 본 논제의 기반이 되는 세 가지 명령을 말한다. 그는 교회와 목사의 최우선적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기의 세 가지 명령으로 이루어진 논제의 타당성이 성경적 말씀 선포와 교회 역사의 관찰 그리고 조직신학에 있다고 본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 최우선주의를 표방하고 느끼는 성경적 명령에 대해 말한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대로 살고, 성경으로 호흡함으로써 성령의 능력을 체험할 것을 강조한다. 그는 선지자들로부터 전해지는 구약성경에서도 그 증거를 보일 수 있지만, 오직 신약성경만을 근거로 한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의 사역에서 그 증거를 찾는다.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은 설교와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은 일차적이 아닌 이차적인 종소리였다. 요한은 이적을 표적(signs)으로 표현했다.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강조한 것은 현재 대중에게 익숙한 교회의 사회적 관심과는 상반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다른 세상의 것으로 보는 예수님의 목적에 관한 대략적 개요를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성경의 가르침이 우선이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의 빛이라고 깨우쳐 주셨다. 나는 복음전도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에서 설교와 교육의 우선순위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알 수 있다고 제안한다.”

로이드 존스는 예수님의 부활 후의 사역에서도 사도들과 신약성경에서 같은 강조점을 보았다. 두 가지 예로 지상명령(마 28:19-20)과 오순절 성령강림을 들고 있다. 그는 지상명령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나의 증인이 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그들의 우선적이고 위대한 의무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른 능력을 약속하셨지만, 그들의 일차적 임무는 너희는 가서 예수를 증거하라는 복음 전도였다.”

여기서 로이드 존스는 명백하게 증인의 개념을 증인의 구두적 역할로 이해한다.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오순절의 많은 현상 중 로이드 존스가 가장 중요하게 꼽는 것 역시 성령의 강림이다. 그는 가장 관심 깊게 보아야 할 사항이 성령 충만한 자들이 오순절 이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설교’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는 설교자가 영혼 구원의 특수사역을 하기 위해서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능력 세례, 불의 세례와 능력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사도행전 6:2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에서 집사회의 개념을 이해시키는 말씀을 명백히 가장 중요한 구절이라고 믿는다. 그는 설교 최우선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로 그 말씀을 적용한다. 그는 “현재 교회의 상황과 우선적 의무를 무엇보다 잘 설명하는 말씀은 없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을 그는 이렇게 적용한다. 물론,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은 과부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궁핍하고 굶주려 있으며 아파할 때 어떻게 우리는 계속 설교만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교회가 당면한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하지만, 성령의 주장하심과 지도 그리고 주님이 부여한 임무에 비추어 사도들은 위험을 직시하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을 떠나 육체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그릇된 것이다. 그리한다면 우리는 설교자에게 맡겨진 임무에 실패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우선적으로 말씀을 전하려 여기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계속해서 기도와 말씀의 사역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로이드 존스의 해석은 이제 이 우선순위가 이제로부터 영원히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재차 설교에 관한 그의 논제와 결론이 현재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렇게 말한다.

“설교는 교회가 해야 할 일차적 임무이며, 교회의 지도자들과 직책을 맡은 자들의 일차적 임무이다. 우리는 어떠한 것에도 어떠한 좋은 이유로든 또는 필요에 의해서도 이 사실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된다.”

로이드 존스가 성경에서 본 설교 최우선주의의 다른 요소로는 진리의 전파가 없다. 그는 설교를 교회의 임무요 설교의 특별함으로 본다. 그는 바울이 디모데전서 3:15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에서 한 말씀이 이 교회의 본질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한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의 본질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일깨워 주었다. 교회는 사회적 기구나 봉사기관 또는 정치적 문화적 모임이 아닌 진리의 기둥과 터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 최우선주의를 표방하며 느끼는 교회사적 명령에 대해 살펴보자. 여기서 그는 설교에 관한 교회사에 대한 폭넓은 관점에 관해 설명하고 특정한 한 시기에 주목한다. 이 논제와 성경적 근거에 관해 설명한다. 이 모든 것은 교회 역사에 의해 충분히 증명된다. 교회 역사를 조감해 볼 때 교회가 쇠퇴한 기간이나 시대는 결국 설교가 죽었던 시대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은가? 무엇이 개혁과 부흥의 아침을 열었던가?

그것은 설교의 소생이다. 로이드 존스는 종교개혁과 부흥의 시기를 예로 든다. 그는 이 시기를 교회 역사상 가장 눈여겨볼 위대한 설교의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사도행전에 기록되었던 것과 같은 역사가 개신교 종교개혁 시기에도 일어났다고 믿는다. 그는 루터, 칼빈, 낙스, 라티머, 리들리를 위대한 설교자로 칭한다.

로이드 존스가 설교 최우선주의 신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신학적 명령에 대해 살펴보자. 그는 “설교 최우선주의에 긍극적 당위성은 조직신학적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성경의 모든 메시지가 이를 명시하며 이 결론을 향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조직신학의 각 분야, 즉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다. 로이드 존스는 신론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강조했다. 또 하나님의 엄위하신 존재, 삼위로 구성된 인격, 영광스러운 속성 등의 선포를 했다. 그는 건전한 성경적 유신론에 뿌리를 두고 설교한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창 1:1)을 인용하면서, 모든 세상사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그는 속죄와 칭의와 화목 교리는 죄를 정죄하고 죄인들을 구속하고 의롭게 하고,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론 관점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의 신분을 함께 제시했다. 그는 “설교는 위에 그리스도를 태우고 아래에 세상을 싣고 가는 마차와 같다”라고 했다. 그는 온전한 그리스도를 온전한 사람으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 설교했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유익을 그분의 인격과 분리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의 권능, 구원에 대한 자발적 의지, 잃어버린 죄인들의 유일한 구속주로서의 가치 등을 반복적으로 설교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가장 고귀한 자로 높이고 인간은 가장 비천한 자로 낮추었다. 오직 그리스도를 설교함으로써 이 땅에서의 한 사람의 상황이 파격적으로 뒤바뀌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없으면 인간은 타락하고 비참하고 무가치하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보았다.

로이드 존스는 인간론 관점에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두 가지를 모두 거론한다. 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곳은 현재 만연한 목회 사역에서의 잘못된 인간론 교리다. 많은 사람이 인간의 상황에 대해 진단하려 하고 결국 인간은 불행하며, 수많은 상황에서의 피해자라고 결론짓는다. 그러한 사람의 일차적 필요는 이러한 일들을 다루고 세상 것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세상 것이 너무나 인간의 상태에 관한 너무나도 피상적인 진단이라고 믿는다. 그는 인간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죄’라고 믿는다. 로이드 존스의 긍정적인 주장은 신약성경에서 역설되고 결론지어진 형태에서 온다. 이것이 성경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본질이다. 죄 속에서 죽은 자, 즉 영적으로 죽은 자다. 이는 하나님의 생명에로부터 죽은 자, 영적인 세상과 그 영역의 선한 영향력으로부터 죽은 자이다. 이것이 인간론의 본질이다.

로이드 존스는 구원론의 관점에서 신적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유한한 지성으로 화해시킬 수 없는 교리로 보았다. 그는 구원에 관한 교리에서 지식과 진리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설교 말씀만으로 구원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그는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을 예로 든다. 또한, 그는 “진리를 아는 것이 구원이다”라고 말한다. 이로써 그는 자기 논제의 결론을 도출해 낸다.

만약 설교가 인간의 가장 중요하게 필요한 것이라면, 만약 궁극적 필요가 말씀의 무지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라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사실에 대해 설교를 듣는 것이고, 이 진실에 대해 설교를 듣는 것이며, 이 사실을 다룰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구원의 길에 대해 설교를 듣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에게는 진실을 전파하는 설교야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설교가 최우선시되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론 관점에서 목사의 부르심과 일반 성도의 직분에 대해 부르심을 똑같은 고귀한 직분으로 인정하나 설교는 오직 목사의 선포(herald)이고 일반 성도는 그리스도에 대해 소문(gossip)을 내는 사람으로 구분한다. 그는 세속사회의 오류가 현대교회의 사상에 스며들어 많은 영향을 미치는 잘못된 생각을 지적한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들의 생활에 융합되며, 그들의 상황에서 벗어나거나 향상하는 데 힘을 쓰는 것이라는 생각을 비판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인간화의 노력은 질병의 증세를 잠시 누그러뜨리는 임시방편의 처방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와 목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인도하며, 하나님과 화합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교회의 특수한 목적이며 또한, 설교의 목적이다.

교회의 일, 설교한다는 일은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이는 아주 특화된 임무이며, 설교야말로 교회의 특별한 임무이다. 교회는 활기와 기대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기관이며 이 일은 오직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이다.

 
  1. 강해설교의 비판에 대한 반박
로이드 존스가 자신의 설교 논제에 대한 비평을 반박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논제 분야에서 현재 상황과 문제 그리고 논제를 간과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를 제시한다. 그는 이런 비평을 충분히 고려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서 이러한 것들의 당위성은 부족했다. 그는 교회와 목회 사역이 사회적, 개인적 또는 다른 부수적인 문제들을 다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반박한다.

로이드 존스는 교회와 목회 사역이 사회적 문제의 관심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다. 로이드 존스는 이 입장을 뒷받침하는 사회 구원의 사상은 구세대의 복음전도 설교가 너무 개인적이고 간단하며, 이러한 접근이 사회문제와 상황을 다루지 못했다고 여기는 데 있다고 본다. 그는 이 입장이 진보적, 근대적 그리고 성경에서 주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많은 이가 이러한 사상을 아주 새롭고 교회가 해 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초반에 총체적으로 실행되었다. 그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이 사상이 성공했는지 효과적이었는지 그리고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러한 노력이 영국 교회들을 텅텅 비우게 했다고 단언한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 노력이 이루려 했던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시대의 종교개혁을 역사적이고 성경적인 기독교, 설교가 중심이 되었던 교회로 되돌아간 사건으로 본다. 그는 청교도 운동이 과학과 문학의 발전을 촉진했고 병원과 교육 시설이 늘어나는 데 큰 역할을 했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염려를 고취했다고 믿는다. 그의 주장은 만약 교회가 그 최우선의 설교 일을 올바로 행하면 다른 결과들인 자선사업이나 사회봉사가 어김없이 따라온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목사가 여러 개인적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설교를 줄이고 개인의 일과 상담과 심방에 힘을 써야 한다는 주장에 반박한다. 로이드 존스는 진정한 설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 줄 뿐 아니라 목사에게 많은 시간을 절약해 준다고 한다. 그는 이것이 자신의 42년 목회 경험으로부터 나온 결론이라고 한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의 중요성과 개인적 문제 해결에 관한 그의 견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청교도들은 목사적인 설교로 아주 유명하다. 청교도들은 개인들의 양심 소리에 관해 그 공 예배 설교에서 다루었다. 청교도들이 이러한 문제를 다룸으로써 듣는 회중의 개인적인 문제들이 함께 풀려 갔다.”

로이드 존스의 반론은 개인 상담이나 이 모든 여타의 활동들은 설교를 보조하기 위한 것이지 대신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러한 다른 것들은 결코 최우선 순위가 될 수 없다. 복음 설교만이 개인의 문제와 영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설교 논지에 반박하는 네 가지 반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로이드 존스는 “시대가 바뀌지 않았는가?” 하는 반론에 관해 설명한다. 그의 대답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셨고 사람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피상적인 것들이 바뀌었다. 우리가 입는 옷이 바뀌었고 우리는 한 시간에 40마일을 달리는 대신 400마일을 여행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의 필요도 똑같이 그리고 정확히 그대로이다. 독서나 TV 시청, 라디오 청취로써 설교의 일이 이루어질 수 없는가? 이러한 반론은 현대인들이 설교를 듣기에는 너무 교육되었고 세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독서나 전자 매체를 통해 설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에 몇 가지 의문과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이런 방법이 너무 개인화된 잘못된 접근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겨 버린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언제든 스위치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은 교회의 본질적인 중요한 요소를 결핍시킨다.

우리는 교회가 복음과 진리, 그리고 그 메시지에 대한 증인의 일부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여 교회에서 같이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설교의 한 부분이며, 이 영향은 예배에 참석하는 누구에게든지 영적 분위기에 즉각적으로 미친다.

설교가 그룹 토론에 의해 이루질 수 없는가? 로이드 존스는 그룹 토론(group discussion), TV 토론을 연구해 본 결과 이를 반대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하나님은 철학적 전제와 같은 토론이나 논박의 대상이 아니다. 그의 생각은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그 자체이시며, 어떠한 사람의 태도가 어떤 특정한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영국 BBC의 C. E. M 조드(C. E. M. Joad)의 공개 토론 초청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조드도 죄인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 영혼, 영원과 같은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의 주제를 다룬다는 것은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엄숙한 일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주제의 심각성이 가장 사려 깊고 엄숙하게 만들어진 분위기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셋째, 보통 사람, 즉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은 토론이나 논쟁,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고린도전서 2:14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라고 했다.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은 이러한 영적 문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룹 토론이 설교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넷째, 자연인은 무엇보다 먼저 겸손해야 한다. 마태복음 18:3에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에 근거한다. 그는 인간의 궁극적 문제는 자기 방법, 자기 지식의 자만심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겸손해져야 하며, 설교야말로 그러한 자만심을 깨워 주고 겸손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설명한다.

그는 이런 전도방법이 거의 성공적이지 못하고, 사람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으며 좋은 결실을 보지도 못하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의 입장에 따라서 그가 주장하는 모든 이유가 타당하더라도 사람들이 목사의 그러한 설교를 들으러 올 것인가? 로이드 존스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진정한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선포하면 사람들은 올 것이며 반드시 온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것이 천천히 일어나는 일일 것이라 인정하면서 이것은 장기적인 정책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과 방법은 통하며, 결과를 낼 것이며, 존중되어야 하고, 꼭 그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1. 강해설교와 신학의 관계성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와 신학의 관계성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그는 강해설교의 신학적 이해와 적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신학적 강해설교를 교회와 목사의 최우선적인 임무로 보았다. 이 시대에 목사에게 가장 중요한 필요는 바로 강해설교가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위치로 회복되는 것이다.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에 충실하며, 명료하고 조직적이며, 현실적인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현시대의 설교에 대한 반응과 씨름했고, 설교 최우선주의의 성경적,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 신학적 당위성을 제시했으며, 그의 논지에 대한 여러 반론에 답변했다. 그는 강해설교에 대한 반론과 반박에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를 현재의 교회와 세상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진정하고 체험된 해답으로 내세웠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설교자들에게 이러한 신념을 그들의 연구와 강단으로 끌어내지 않는 한 결코 성경적인 성과는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로이드 존스의 신학적 설교의 방법과 설교의 중요한 위치에 관한 중대한 조언으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그는 강해설교를 교회와 목사의 주된 임무로 보면서 심방, 상담이나 강단에서의 기도 같은 목회 사역의 모든 부분에 대해 언급하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가 로마서 12장의 ‘예배와 공동체’와 고린도전서 12장의 ‘신령한 은사’에서 제안하는 교회의 사역과 임무에 대한 것들에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가 “설교가 모든 것을 주장하며 다른 모든 것의 성격을 주관한다”라고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가 신학적 강해설교가 이러한 다른 부수적인 것의 성격을 결정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함축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의 설교행위와 신학적 설교 내용의 강해설교만이 인간의 구원과 교회의 부흥을 이룬다고 주장했다.

 
  1. 결 론
로이드 존스는 성경적인 목회의 탁월한 본보기이며 복음의 신실하고 충실한 증인이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 특징은 정확하고 분명한 성경 해석과 해설, 성도들이 쉽게 듣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딱딱하고 지루하지 않게 성경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또한, 로이드 존스는 성경 말씀을 직접적인 삶 속에서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목회 기간 내내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를 도왔던 상담 목사였다. 그리고 그는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강해설교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성경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일에 일생을 헌신한 목회자였다.

로이드 존스는 특별히 현대의 목회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닮아가야 할 영적 멘토요 강해설교자였다. 그는 성경이 취하는 견해를 밝혔고 성경이 가르치는 것 위에 서고자 했다. 그는 모든 설교는 성경 본문에 확실한 기초를 둔 ‘강해설교’여야 함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설교했다. 그리고 설교자의 할 일은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생각을 알리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청교도 신앙을 강조했다. 로이드 존스가 교회사 중에서도 특별히 17세기 청교도의 신앙을 강조하고 계승한 점은 그의 매우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다. 청교도들의 신앙과 그들이 저술한 책들 속에는 뛰어나고 정확한 성경적 교리와 해석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교도들은 지식적 신앙보다 성경의 말씀이 매일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매우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이러한 청교도들의 목회와 신학, 설교, 신앙, 고난, 교회, 영성, 수많은 저서 등의 중요함을 깨우쳐 주면서 탁월한 청교도들의 유업을 재조명해 주었다. 이처럼 청교도 신학과 영성에 흠뻑 젖어 있었던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을 영적 보물이라고 말했다.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했다. 목회하는 동안 밀려오던 현대주의(Modernism)와 에큐메니컬(ecumenical) 운동에 맞섰다.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은 교회 쇠퇴를 해결하는 데 유일한 대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와 여러 복음주의 단체가 에큐메니컬 운동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였으며 순수한 복음만이 선포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는 교리를 생명처럼 여기면서 복음이 순수하게 남을 수 있도록 교회를 지켰다.

로이드 존스는 영국 교회가 침체하게 된 원인은 자유주의자들의 성경 고등비평으로 인해 성경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해석하고 전파하는 것이 성경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흥의 세기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을 때였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는 구원에 있어서 필수가 되는 교리인 “성경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십자가 대속의 교리, 성령의 인격과 그의 역사” 등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었다. 하지만 부차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는 “중생 후 성령세례, 성령의 은사, 세례, 교회의 정치형태, 천년왕국”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 운동을 강조했다. 웨일즈 부흥 운동의 주역인 하웰 해리스의 목회에 관한 소책자를 읽고서 큰 영향을 받았던 로이드 존스는 교회사에 나타난 위대한 부흥 시기와 설교자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전기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에게 부흥과 부흥의 필요성은 평생에 걸친 열정이었다. 그는 궁극적인 영적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인 부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오늘날 교회가 비참하게 실패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성령의 강권적인 부어주심인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갈망하도록 했다.

우리가 부흥의 필요성을 깨달을 때까지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없고, 또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없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부흥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능력 있고 세심한 강해설교자가 되려면 하나님이 부흥을 내리셨던 과거 세대들 속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익숙하게 알아야 했다.

그는 십자가가 메시지의 중심이었다. 로이드 존스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했다. 그가 볼 때 십자가는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메시지 핵심은 항상 십자가였다. 그는 우리가 살고 죽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태도가 영광스러운 복음 사역자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교회사적으로 보았을 때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해 엄청난 강조점이 주어졌고, 그리스도의 보혈 피에 대한 찬송가를 가장 많이 불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십자가의 피를 부인하는 동안에는 부흥은 결코 기대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분명코 점점 잊혀지고 있는 십자가와 보혈의 찬송을 많이 회복해 주었다.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 강해〉 시리즈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사)한국기독교보수교단협의회본부 미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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