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 목사의 설교와 사상
- 영국의 청교도 목사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은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고 성취되었다. 그리고 청교도 운동이 목회적이며, 영적이며, 설교적 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청교도들은 세속사회와 육체적인 향락 그리고 악마에 대한 정말로 어려운 영적 싸움에서 맹렬하고 용감하게 싸웠던 십자가 군병들이었다. 청교도 목사는 영적 거인들이며 그들의 교훈과 설교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준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예언〉(prophesyings)이라는 시와 강해 설교와 토론을 위한 목사들의 모임을 통하여 생산되었던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가 영국의 왕정복고 때 추방되었던 비국교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교파와 관계없이 받아들여졌고, 용기를 주었고, 또 반대를 당하기도 하였다.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기도 하는 한편, 논박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조롱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존경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결코 무시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시될 수도 없었다.
영국 국민 중에서 가장 적은 수효의 청교도주의 성도들을, 다른 어떤 교파보다도 더욱 진실성 있는 교리로 변화시켰던 청교도 목사들에 관해 설명하기는 어렵지가 않다. 청교도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멀리 있는 ‘약속된 땅’ 천국으로 성도들을 인도했으며, ‘약속된 땅’ 모두를 소유하고 그 땅의 모든 열매를 수확하도록 가르쳤다. 청교도 목사들은 설교사역에 큰 관심을 두었다. 설교는 일상생활로 파생된 직유법과 은유법을 사용하였고 생활의 간증과 예화도 많았고 회화적인 스타일도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가장 순박한 영혼들을 깨우치는 값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가장 평범한 설교를 하였지만 가장 큰 진리를 진실하게 느끼도록 하였으며, 나아가서 청교도 목사들은 성도들이 성경을 신앙생활의 표준서로써 매일 읽도록 권장하였다.
청교도들은 철저하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가르쳤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불멸하는 영혼을 성스럽게 인도하고 많은 위안을 주시는 풍성한 마음의 보고로 가르쳤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의 신앙생활은 성경 말씀 때문에 결정되었고 일상생활의 지침이 성경에 의해서 지켜지도록 강하게 요구되었다. 청교도 목사들이 인도하는 집회에서는 설교자가 “하나님께 향한 왕이요, 목자”로 느끼게 되었다. 청교도 목사들은 그렇게 살려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청교도 목사들은 학문적인 지식과 일상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양심적이고 지적인 설교를 하였다. 청교도의 설교는 기도실에서 얻어진 아주 명상적인 색채를 풍긴다. 또 시(詩)중에서 얻어진 주의 깊은 일상생활의 경험이 넘쳐 흐르고 있다.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는 삶을 있는 그대로 다루었기 때문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들의 육신은 교구(敎區)의 협소한 장소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청교도들의 기도는 시골과 대도시를 풍미하였다. 또한, 이러한 기도의 결과로 조명된 설교는 불안한 시대에 취한 행동 규범에 맞추어 행하여졌다. 청교도 목사의 신앙심은 깊었고 청교도 목사들은 현실적이고 신학 실천적이었다.
리차드 박스터는 골수 청교도로 모든 숨구멍에도 청교도주의를 내뿜는 목사다. 그가 가진 스타일은 “고상한 무관심”과 세련되지 않은 진실한 설교의 바램을 보여준다. 그는 형이상학적 추상 개념을 짜내며, 그러면서도 당연한 현실의 화약 냄새를 맡으면서 라운드 헤드(Round head)의 전속 목사로 훌륭하게 재임하였다. 특별히 교회에 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주일이면 제일 좋은 옷을 입지만, 청교도 목사들은 그 성도들이 일할 때 가게 앞치마나 농사꾼 옷을 걸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청교도 목사들은 ‘단지 하나님의 날’에 성도(聖徒)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고 공장이나 가게나 들판에서 일할 성도들의 삶과 마음에 영향을 주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청교도 목사들은 박스터와 같이 많은 시간을 바쳐서 영혼에 대하여 설교하였다. 마음과 신앙생활의 정신에 대해서도 설교하였다.
박스터는 168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그의 실천적 사역은 28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과 『개혁된 목사』에서 교회의 진정한 본질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규정 짓고 있다. 그는 정직한 마음과 헌신적인 마음으로 설교를 했다. 이처럼 16세기와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했다.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영적 진리에 대해 교육을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혹은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는 영적 힘으로 용기를 얻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들의 삶을 인도했다.
청교도 목사는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말씀을 믿고 신앙생활에 대한 강조를 생각한다. 청교도 목사는 성경 연구를 충분히 준비한 목회가 참된 믿음의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실은 청교도 목사에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정규적인 높은 교육은 목사직을 열망하는 젊은이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였다. 영국과 미국의 이러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영국에서 케임브리지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이, 미국에서 1636년에 청교도 하버드 목사가 하버드대학을 설립했다는 것은 많은 언급이 필요 없을 만큼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버드대학 헌장은 “하버드는 영국민과 인디안 젊은들에게 지식과 신앙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하였다.” 교훈은 “그리스도와 교회”였다.
- 미국의 청교도 목사
미국에서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기 위해서 신앙을 자유를 찾아 나선 순례자들은 목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매우 중요시했다. 존 엘리엇은 『뉴잉글랜드의 첫 번 열매들』(New England’s First Fruits)에서 “우리가 애타게 기다렸고 관심을 가졌던 다음 과제 중의 하나가 학문을 촉진하여 후대에 남기는 것이었다. 무식한 목사를 교회로 떠나보냈을 때 우리의 현재 목사들은 먼지 속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목사 자신들도 자신들의 소명 때문에 어떤 긍정적인 특성들이 도입되어야 하는가를 간혹 언급했다. 존 카튼은 목사의 책임들에는 성도들과 우호 있게 지내고, 개인적인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고, 자신들의 소명에 성실하고, 열매 맺는 목회를 하고, 비이기적이며 손님 대접을 잘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말했다. 조나단 미첼을 성공적인 설교자로 평가하는 잉크리즈 매더의 기준 중의 한 가지는 “그의 각성시키는 목회로 회중들 가운데 종종 조는 사람들보다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이었다. 토마스 쉐퍼드 목사의 사망에 대해 이웃 목사 우리안 오크스는 고인이 된 형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외모는 비록 온화하고 호감이 가며 엄하지 않지만, 존경과 경의를 요구한다. 언제나 내가 볼 때마다 그는 매우 유머스럽고 두려움보다는 사랑과 지혜에 의해 더 많이 움직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청교도 목사는 말씀을 알고 효과적으로 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다. 청교도 신학과 교회 정치의 회중교회 형태와 순결을 강조하려는 교회 회원자격의 엄격한 정책은 성직자의 능력을 제한시켰을 것 같지만,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목사들은 그런데도 17세기의 가장 기품있고 존경받는 신앙 전문가들이었다. 분명히 더욱 일찍 건설된 버지니아보다 뉴잉글랜드에 더 많은 목회자가 매력을 느꼈다. 존 엘리엇은 1650년에 매사추세츠에서 실무를 행하는 37명의 목사 –영국인 주민 415명당 1명꼴-의 명단을 기재했고 그 비율은 3,237명의 주민당 1명꼴이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전혀 교회에 초청받지 못했고 또 일부는 잠깐 머물다 떠났다.
성직자들은 종종 평신도들에게 목사의 중요성을 일깨워줌으로 자신들의 공동체에 영향력 –법적인 영향력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 암시들은 17세기의 변천과 함께 증가하였다. 왜냐하면, 성직자들이 자신들의 지위가, 점점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저하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말씀을 능력있게 설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존 카튼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르치는 제사장이 없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불안한 상태에 있게 된다”고 매우 강력하게 말했다.
목사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대사들로 묘사했다.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말하도록 하시는 것을 말하며, 간혹 이 시대의 배교를 비난하는 말을 해야 하는 대사들인데 이 점이 자신들을 인기 없게 한다고 묘사했다. 조시아 플린트는 뉴잉글랜드 인들에게 “만일 그대들이 이 메시지들을 멸시한다면 그대들은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메시지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용건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 목사들은 그대들 앞에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서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그대들에게 거부를 받아야 하시겠는가?”라고 경고했다.
플린트는 이어 자신의 회중에 “진리를 선포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대리자들에게 화내지 말라, 그들이 말하고 싶어 말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렇지 않다. 그들의 영혼은 그대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 고통을 겪는다”고 애원했다. 뛰어난 목사가 죽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고 있는 자기 백성에게 완전한 진노를 내리시기에 앞서 자신의 신실한 종을 거두어 가시는 심판의 전조이며 표적으로 해석되었다. 17세기가 진행함에 따라 지도자급의 성직자들이 사망함으로 그 결과가 “말씀의 기근, 양 떼의 흩어짐”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비록 성직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매우 주의 깊게 적용해야 하는” 자신들의 중대한 책임을 알고 있었으나 또한 자신들의 인간적인 약점에 대해서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죄와 인간의 부패에 대한 신학은 청교도들이 완전주의자들이나 유토피아의 주민들이 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목회자를 포함하여 지상의 어떤 성도도 무죄한 완전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데도 그 이상을 위해 노력을 해야 했다. “무덤 이편에는 어떤 약점이 없이 완전히 거룩한 사람은 없다. 어떤 흠이나 결점이 발견되지 않는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사무엘 윌라드는 선언했다. 토마스 쉐퍼드는 자기 양 떼에게 그들이 “사람들을 너무 신뢰하지 말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너무 많이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조셉 벨처는 자기 청중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상태를 경험할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 상태는 그가 영광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기까지 유보되어있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선한 사람들도 그들 안에 이중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제임스 알렌은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종들일지라도 “이 세상의 다른 선한 사람과 같이 약점이 있는 사람들에 불과하므로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고 주장했다. 토마스 쉐퍼드는 하나님의 음성과 설교자의 음성을 구별하라고 회중에 권함으로 목회자의 무오성에 대한 생각을 금지했다. 그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함으로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라”고 말한 다음 “나는 목사들이 말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고 부언했다.
17세기 동안의 뉴잉글랜드에 3세대의 성직자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제1세대는 대개 1610년 전에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2세대도 대부분 1620년과 1640년 사이에 영국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교육을 받았다. 제3세대들은 모두 정통적인 청교도 신학 지향성을 나타냈지만, 사회가 점점 세속화되고 다원화됨으로 성직자의 영향을 약화했기 때문에 각각 이어지는 세대에게서도 성직 전문화를 향해 증대하는 동향이 식별된다.
제1세대의 초기에 소명 받은 복음의 사역자로서의 성직자의 위치는 지역 교회로 함께 언약한 신자들의 집단과의 관계 때문에 완전히 결정되었다. 목사의 학문과 경건의 기준들이 존재했지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도록 공식화되거나 규격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회중들이 자신들의 목사를 선택했고, 평신도들이 목사의 성직 취임식 의식에 참여했지만 대개 성직 수임식 설교를 성직을 받는 목사 자신이 했다. 이러한 목회자의 입회의식은 목사가 신자들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관념을 강화했다.
데이비드 홀 (David D. Hall)이 지적한 바와 같이 17세기 중엽에 목회자의 예언자 역할과 제사장 역할 간에 어떤 긴장이 존재했다. 신임 목사 성직 취임식이 회중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사들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중대한 변화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직 수임자가 지역 회중의 활동으로 자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계급에 참가함으로 자격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상징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말에 이르자 평신도들은 종종 성직 취임식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결국, 목사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특별하게 거룩한 인간 집단을 구성한다고 마치 악해져 가는 사회에서 그들만이 공동체의 신앙생활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전문 성직자 계급을 향한 움직임은 목사의 지위와 영향력의 확실한 쇠퇴기로 인해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뉴잉글랜드가 더욱 세속화되고 다원화되면 될수록 목회자들은 이단과 신성모독과 교회 출석 요구에 대한 권한을 부여하여 뒷받침 해주고 보다 엄격한 법을 만들 것을 더욱 큰소리로 요구했다. 1650년대에 평신도의 설교가 늘어난 것은 목회자들의 형식주의 증가에 대한 불만이 커지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회중들은 제2세대의 목회자들과 정식 계약을 맺기 시작하여 양 떼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목자로서의 목사 이미지를 어느 정도 약화했다.
증대하는 문제들, 쇠퇴하는 영향력, 그리고 지역 회중들에 의한 임시 고용 목사의 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사들은 여러 해 동안 한 교회에 머물러 있었으며 그들은 회중들에 사랑을 받거나 적어도 너그럽게 용납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스턴의 최초의 목사인 존 윌슨은 1630년부터 1667년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강단에서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하려고 머물렀다.
제임스 알렌은 보스턴제일교회에서 1668년부터 1710년 사망할 때까지 목회했다. 잉크리즈 매더는 1664년부터 1723년까지 보스턴 제이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했고 그의 아들 카튼 매더는 1685년부터 같은 교회에서 아버지를 돕다가 뒤를 이어 1727년까지 목회했다. 사무엘 윌라드는 1678년부터 1707년까지 보스턴 제삼교회에서 목회했다. 존 앨랜의 데드햄 강단에서의 종신 재직은 1639년에서 1671년까지 이어졌고 존 댄포드는 같은 강단을 1682년에서 1730년까지 지켰다.
존 엘리엇은 인디언 선교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능력으로 1632년에서 1690년까지 록스베리교회를 신실하게 섬겼다. 이들과 유사한 다른 사람들은 진실로 “신실한 목사들”이었고 그들의 삶은 적어도 17세기 뉴잉글랜드인들 거의 모두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앞으로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활동한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와 사상을 간추려서 설명하고자 한다. 청교도의 설교 특질에 의해서, 설교의 힘 있는 진실성과 영적인 힘으로, 청교도 교리의 건전성과 교리의 실질적 적용의 엄격성에 의해서, 청교도 목사들이 영국과 뉴잉글랜드에서 복음적인 설교의 황금기를 가져왔다. 우리는 실천신학의 본보기가 되는 청교도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 헨리 스미스
헨리 스미스(Henry Smith, 1560~1591)는 그린힐의 제자였으며 데링처럼 31세의 짧은 생애를 통하여 청교도 운동을 대변한 이름난 웅변가이자 설교자였다. 후대 청교도 설교보다는 덜 세련되었지만, 스미스의 설교는 내용적인 면에서 핵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직설적이며 열정적이면서도 귀중하고도 소박한 웅변 스타일로 설교를 하였다. 그는 온몸의 진액을 쏟아 설교와 목회함으로 요절했다.
많은 사람이 헨리 스미스가 담임하고 있었던 런던의 성 클레멘트 데인즈(St. Clement Danes, London)교회에서 그가 얻은 별명대로 〈은으로 만든 혀를 가진 스미스〉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몰려들었다. 스미스는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황금의 입〉이라는 명성을 이어받을 목사로 인정받은 것이다. 청중들은 스미스의 설교에 감명을 받아서 계속 앉아 있기를 좋아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몰려온 사람들은, 채소 장사, 열쇠 장사, 소매상 등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옛날 역사가 중에 아주 괴짜였던 토마스 훌러(Thomas Fuller)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스미스의 교회는 청중이 넘쳤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신의 의자(그들의 다리를 의미)를 가지고 와서 복도에 서 있었는데 그들의 귀는 스미스의 입을 통해 듣고, 마음은 귀를 통하여 들으므로, 스미스는 손안에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쇠를 가진 것 같았다. 그래서 청중을 자신이 바랐던 천국으로 몰고 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미스는 청중을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선을 향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이끌고 갔습니다.”
스미스는 강단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드는 특권이라고 했다. 그는 내일 다시 설교하는 것이 확실치 않으므로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설교했다(as a dying to dying man).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면서 복음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고 성경의 진리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설교했다. 항상 성령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였다. 스미스의 가장 큰 소망은 죄인들을 그리스도께로 회심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설교의 특징은 강단에서 복음선포와 열정과 능력과 감동적인 표현이며 설교의 정수를 말한다.
스미스는 너무 일찍이 죽었으나 “그는 짧은 생애를 길게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헨리 스미스의 런던 목사 생활은 단지 3년밖에 계속되지 않았으나 스미스는 곧 런던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청중들의 유익만을 위해 말씀으로 그들을 인도하였다. 그는 구원 사역에 능통하였다. 이 시기에 온 런던 시내는 스미스의 설교에 매혹되었다. 그의 설교는 인기가 아주 좋아서 출판사들은 스미스가 설교할 때 받아썼다가 그의 설교를 곧바로 책으로 출판하였으며 몇 세대가 지나는 동안 스미스의 설교집(說敎集)은 영국 가정의 필독서로 준비되어 있었고 아주 많은 판(版)을 거듭하였다.
- 윌리암 퍼킨스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청교도를 확립한 개척자이다. 그는 역사적 청교도를 형성화하고 공고히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한 해에 왓톤(Warton)에서 태어났으며, 19세에 케임브리지 그리스도대학(Christs’ College, Cambridge)에 입학하여 자비 생으로 공부하였다. 그가 음주와 불경스러운 언행에 탐닉하였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자기 자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입 다물어. 아니면 저기 주정뱅이 퍼킨스에게 데려갈 거야.”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것을 발견한 뒤에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고 반성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었다. 그의 위대한 변화는 그가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에 찾아왔다. 그는 24세의 나이에 그리스도대학의 특별연구원(Feollow)이 되었으며 그 후 1602년에 요절할 때까지 약 15년 동안 그 대학도시에 있는 가난한 소외계층의 성 앤드류교회(St. Andrew’s Church)에서 설교하였다. 그는 1584년에 신학석사를 취득했다. 그는 전형적인 칼빈주의자가 되었으며 영적 생활의 욕구가 강하였다. 그가 담석으로 4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청교도 운동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던 탁월한 지도자요 원조인 인물이었다.
퍼킨스의 특별한 강점은 조직적이며 학문적이고 탄탄하며 동시에 간결했다. 그의 매력적이고 실제적 경건함, 대중화의 능력, 신학적인 활동이 탁월했다.
- 황금 사슬
퍼킨스는 목사 안수를 받고 성 앤드루스교회의 설교자로 일하였으며, 케임브리지 감옥의 죄수들에게 주로 설교하였다. 하루는 그가 채플린으로 사형집행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죽음에 대해서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죄수와 만나게 되었다. 퍼킨스는 그 청년의 곁에서 무릎을 꿇고, “형제여!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당신에게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싶소. 그리스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당신도 죄를 용서받는 체험하고 구원을 받으십시오!”라고 눈물로서 간곡히 호소하였다.
이 청년 죄수는 예수를 영접하였다. 퍼킨스는 자비의 손을 뻗어 그에게 구세주 되시는 주님을 보여주었다. 그의 섬세한 기도는 내적인 위안을 주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청년 죄수는 침착하게 그의 사형집행 날짜를 기다렸다. 그 청년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이 임하여 하늘 문이 열리기를 바랐다.
퍼킨스는 학창시절에 예정론에 대해서 냉담하고 인정이 없는 신학이라고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내가 예정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몰라서 예정교리가 불안하게 만든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태초부터 시작하면 내가 예정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아무도 모르며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옥 전도를 통해서 예정론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모든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고 영접할 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것은 성경대로 믿음의 현재, 즉 내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구원에 대한 확신 가운데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았는가?
믿음으로 받았는데 이 믿음이 어떻게 왔는가?
내가 믿는 순간에 내가 믿음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의 결단을 한 것 같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같이 영적으로 눈이 멀었던 자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이며 그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았는가?
믿는 자의 관점에서 믿음을 생각해 볼 때, 내가 믿기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령이 임하셔서 그의 은혜로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했다. 또 그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강퍅한 의지를 꺾어서 그에게 순종하게 된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믿는 순간에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결단한 것 같으나 믿고 보니 성령이 역사하신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내가 알기 전에 내 안에 역사하셔서 복음을 들을 기회를 주었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변치 않고 신실하며 태초의 계획을 행하시는 분이다. 태초부터 나를 구원하실 의지가 있었고 합당한 때에 성령의 역사로 영적인 눈을 뜨게 하였고 복음을 믿게 하였고 구원을 받도록 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려는 예정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예정의 교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믿음의 현재 상태에서이다. 내가 믿음의 현재에서 어떻게 믿음이 와서 내가 구원받았는가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하지 않는 분이시니까 태초에 구원하시겠다고 예정한 그 계획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예정론의 이해는 성도의 신앙적 삶을 깊게 할 뿐 아니라 보호한다.
퍼킨스의 예정과 파멸을 다룬 그의 주요 저서인 『황금 사슬』(Golden Chain)은 청교도 신학과 설교에 대한 근본적인 교리였고 그것이 오늘의 개혁주의 교리로 나타났다. 퍼킨스는 『황금 사슬』에서 “성경 자체가 선한 삶을 영위하기에 충분한 교리이다. 그것은 수많은 거룩한 학문을 포괄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주인이라면 나머지는 시녀 내지는 하인이다. 여기서 주인이 되는 학문이 곧 신학이다. 신학은 복된 영생을 위한 학문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신학을 영원히 축복 된 삶에 대한 학문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태초에 나를 구원하겠다고 예정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 그 신실하시고 변치 않는 하나님은 그 구원의 계획을 끝까지 성취하신다. 나 같은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은 중간에 내가 좀 잘못을 했다고 박차지 않으신다. 내가 설령 거꾸러지고 믿음이 약해서 방황하고 죄를 지어도 끝까지 지탱하시고 지키시며 버리지 않는다. 종말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나를 지키신다는 확신하게 한다.
이 예정의 교리, 황금 사슬 이론은 확신과 위안을 주는 교리이다. 선택에 의한 확신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 얻어지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은 실망을 주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선택 명령을 집행하는 외적 수단으로 행위 언약과 은혜 언약을 말한다. 이는 값없이 그리스도와 그의 유익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그로써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으로서, 인간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자기 죄를 회개하라는 것이다. 또 새 언약은 복음선포와 성례 전을 통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복음은 신앙을 영혼 속에 조성하고 유도하기 위한 성령의 도관이며, 성례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은혜가 성도에게 모종의 외적인 예시를 통해 실현되고 드러나고 인침을 받는 것이다.
퍼킨스의 종말론에 대한 분석과 조직은 놀랄만하며 특별히 택함. 받은 성도들의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 관계를 명백히 밝히었다. 그는 믿음이란 죄인들의 자유의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에 관한 결과라고 가르쳤다. 유효한 소명은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으며, 칭의는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성화(聖火)의 결과이며 완전한 순종에 이르게 한다고 가르쳤다.
성화는 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점차로 거룩함과 의에 있어서 새로워진다. 하나님의 사랑 선포 단계는 영화인데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 형상으로 완전하게 변모하는 것이다. 영화의 출발점은 죽음이지만 이는 최후의 심판 전에는 성취되거나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황금 사슬』의 흥미 있는 관점은 종교적인 열광자들의 참회는 단지 일시적이며 영원성이 없다는 것이다. 퍼킨스는 구원이 세례나 신앙고백, 교회의식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설교하였다. 그리고 성도들의 진정한 인내와 순종과 선행은 구원의 결과라고 하였다. 퍼킨스는 청중들에게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지 않기 위해서 매우 조심하였다.
퍼킨스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행한 구원론에 대한 설교는 영국 청교도 운동이 17세기에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7세기에 걸쳐 영미에서 그의 권위는 칼빈과 후커(Hooker) 바로 다음이었다. 위대한 신학자로서 퍼킨스는 케임브리지 그리스도대학(Christ’s College)의 연구원이자 성 앤드류(St. Andrews)대학의 교수로서 명성을 떨쳤다. 그의 설교는 명확하고 실제적이며, 강한 영적 힘이 있었다. 율법과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포함된 설교였지만, 그의 설교의 가장 뚜렷한 특징 중의 하나가 ‘불안한 인간의 양심’을 다루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 사자의 부르짖음 같은 웅변을 토하였던 퍼킨스는 영국에서도 특이한 청교도주의자였다.
퍼킨스는 진실한 목사는 해석자로서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의 해석자이고, 사람들의 소원을 펼쳐 놓고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 사죄와 용서를 간청함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의 해석자라는 것이다.
- 은으로 만든 혀
퍼킨스는 마치 〈은으로 만든 혀〉로 설교하듯 순수한 복음을 전파함으로 엄청난 영향을 남겼다. 심지어 1613년 토마스 구드윈이 케임브리지에 올라갔을 때 그는 우리에게 “도시 전체가 퍼킨스의 목회에 관한 이야기로 꽉 차 있었다”라고 하였다. 사무엘 클라크(Samuel Clarke)도 “퍼킨스 목사님은 훨훨 타오르는 찬란한 빛을 설교해 주셨으며, 그 섬광은 온 나라 방방곡곡에까지 날아가서 비쳤다”라고 했다. 그는 최초의 저서인 『설교의 기술』(The Art of Prophesying)에서 설교자를 지도하고 안내해야 할 네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첫째, 설교자는 권위 있는 성경의 본문을 명백하게 이해할 때까지 읽어야 한다. 둘째, 설교자는 성경 자체를 근거로 읽은 본문의 의미와 이해한 내용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 강해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성경을 성경에 비교해야 한다. 셋째, 설교자는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로부터 몇 가지 유익한 교리 사항을 수집해야 한다. 넷째, 설교자가 은사가 있다면 올바르게 수집된 교리들을 단순하고 쉬운 말로 사람들의 삶과 자세에 적용해야 한다.
이것은 영국 청교도의 설교뿐만 아니라 참되고 진실한 영적 부흥 설교를 잘 묘사한 것이다. 에임스 같은 청교도 저술가는 ’불안한 인간 영혼‘에 대한 의구심과 공포를 다루는데 뛰어났던 후대(後代)청교도 저술가였다. 그는 처음에 그러한 주제에 대한 퍼킨스의 설교를 듣고서 목사직을 선택할 수 있도록 인도받았다.
이들은 퍼킨스의 설명적인 설교와 경건한 삶을 영위했던 철저하고도 전형적인 청교도 기준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그의 설교는 저속하지 않았으며, 경건하여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에 경의를 표했으며, 난해하지 않고 복잡하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했다. 이런 영향에 의해 청교도의 젊은 세대는 기적같이 쓰임 받은 퍼킨스에 의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 퍼킨스의 저술들은 당시 유럽 전역에서 가장 풍성한 결실을 보았다.
- 경건주의
퍼킨스는 경건주의 아버지로 불린다. 청교도적 경건주의는 퍼킨스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경건주의가 역사적 실체로서 드러나기 시작한 것도 그와 더불어 있었다. 그 이후부터 경건주의는 사라지지 않고 점점 모든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성도의 실질적인 삶에 중점을 둔 청교도주의의 경건성은 이후에 대두되는 경건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퍼킨스는 일상에서 모두를 감동하게 할 만큼 온화하고 온건하며 개인적인 거룩함을 가졌다.
회중교회의 저명한 신학자 존 로빈슨(John Robinson)은 그의 『논문집』(Miscellanies)에서 퍼킨스를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이며 비록 오래전에 죽었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존재”라고 하였다. 네덜란드의 보에티우스(Voetius)는 퍼킨스를 “모든 종류의 신학과 학술에 정통하고 정력적이며 호머와 같은 인물”이라고 불렀다.
퍼킨스는 종교적인 문제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즉, 개인 중생의 필요성, 확신의 평안, 기쁨에 관한 탐구, 죄를 들어내고 그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덮기 위한, 다시 말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적용하기 위한 자기 성찰의 의무와 훈련, 영광 육의 싸움에 대한 경험, 복종의 길을 가면서 겪는 실수와 회복의 현실, 의심, 좌절, 우울과 싸움, 죽을 때까지 되풀이되는 회개의 실천, 부정행위에 대한 양심적인 회피를 호소했다.
퍼킨스는 당시 개혁파 교회 안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였다. 퍼킨스는 『작은 겨자씨 한 알』에서 성령을 통한 죄인의 회심을 시간에 걸쳐 전인격적으로 일어나는 통합적인 과정으로 묘사했다. 사람이 본래의 죄성에서부터 초자연적인 거룩함으로 가는 개인적인 변화를 주장했다.
그는 성경해석을 포함한 신학과 영성과 윤리에 걸쳐 거의 50개의 논문을 남겼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에 관한 논문을 주로 썼고, 그의 갈라디아서・마태복음서・히브리서 강해 설교도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황금 사슬・기도・금식・예배・절제・성례에의 참여・병든 육신의 치료・서약・맹세・검약・자비・관용 등의 규칙을 제시한 3권으로 된 『양심의 문제들』(Cases of Conscience)은 그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저작들은 라틴어・불어・화란어・스페인어로 거의 번역 출판되었으며, 『퍼킨스의 사역』이라는 3권의 책에 그의 논문들이 모두 담겨 있다.
- 질병과 임종
퍼킨스는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청교도였다. 그는 짧은 생애를 불살라 하나님께 드렸다. 퍼킨스를 괴롭힌 질병은 신장 결석이었다. 젊어서부터 투병했던 그는 44세의 젊은 나이로 임종했는데, 죽어 가면서도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문병 온 친구가 “고통을 진정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고 말하자 친구의 손을 꽉 잡고 “잠깐! 잠깐! 그렇게 기도하지 말고 주님께서 내게 믿음과 인내를 주시도록 기도하게”라고 했다. 퍼킨스는 1602년 10월 16일 자신의 죄를 회개한 후에 “주여 나의 태만 하였던 죄를 특별히 용서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아름답게 죽음을 맞이했다. 몽테이규(Montague)는 장례설교에서 “나의 종 모세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사실 청교도주의는 성경적이고 경건적이고 교회적이고 개혁적이고 논쟁적이고 문화적인 관심을 가지고 여러 방면에서 퍼킨스 목사와 함께 성장했다.